일상에서/메모

세계노동절의 유래와 투쟁

photographer2js 2010. 5. 1. 08:40

◆ 120여년 전, 미국노동자들의 투쟁과 세계노동절

1886년 미국.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장시간의 노동에 일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 하는 허름한 판잣집의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멈추고, 공장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고 상가도 문을 닫고 운전수도 따라서 쉬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 세계가 멈춘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했다. 그 다음날 30여만명의 노동자, 시민이 헤이마켓 광장 평화집회 참가해 경찰의 만행을 규탄했다. 그때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이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이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억울하게 폭동죄를 뒤집어 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헤이마키트 사건이다.

 

◆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는 이렇게 최후진술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코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나 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닌가? ...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무죄였던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1889년 7월 세계 여러 나라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노동자의 투쟁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월 1일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했다. 그리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890년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각 국의 형편에 맞게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 질곡과 투쟁의 우리나라 세계노동절의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 행사는 1923년 일제 식민지 시절, 당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인 ‘조선 노동 총연맹’의 주도하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약 2000여명의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전 세계 노동자의 명절인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최초로 치렀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굽힘 없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다.

해방 이후 전평은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메이데이 기념식을 성대히 치뤘다.


1957년 5월 22일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 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되도록 제정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대한노총은 1958년 11차 전국대의원 대회에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의 결성일인 3월 10일 노동절로 정하고 보사부의 인준을 받았다. 1959년 3월 10일 제1회 노동절 기념대회가 열렸다.

5.16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껍데기만 남은 노동절도 그 이름이 마땅치 않아 19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이름을 ‘근로자의 날’로 만들었다.

 

◆ 다시 찾은 세계 노동절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은 단위노조에서 지역, 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했다. 1989년 투쟁본부는 제100회 메이데이를 앞두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굴욕에 찬 지난날의 근로자 인생을 청산하고 한국 전쟁이후 단절되었던 5월 1일 세계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로인해 1989년 삼엄한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연세대학교에 모인 전국의 5천여 노동자와 청년들은 전야제를 갖고 4월 30일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5월 1일에는 전국에서 동맹파업, 총회투쟁,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1993년 5월 1일 탄압 받지 않고 노동절 집회를 열었으며, 1994년 정부는 3월 10일이 아닌 5월 1일을 노동자의 날로 개정하여 ’합법성‘을 쟁취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식적인 이름은 여전히 ’근로자의 날‘이다.